1960년 4.19의거를 거쳐 7.29 총선거로 새로 소집된 국회에서는 자유당의 강압적 전횡으로 개악된 지방자치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 들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출신 민의원 이만우 외 23명이 도와 서울특별시 이외 인구 100만 이상은 정부 직할시로 한다는 개정 지방자치 법률안을 제안 그러나 역시 부결되었다. 5.16혁명 후인 1961년 9월 내무부 장관의 고문이던 한태연이 직할시 승격에 관한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1962년 5월 22일에는 혁명정부에서 부산시의 정부직할시 승격의 필요성 여부의 구체적인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최고회의 내무분좌 위원회 위원 및 내무부 당무자가 부산으로 내려와 실정을 조사하였다. 이로써 직할시 승격의 정당성이 구체화 되었다. 1962년 9월 5일 내무부에..
경상남도 관할아래 있던 부산시가 정부 직할시로 승격한 것은 1963년 1월 1일이다. 광복을 본 그 해 부산의 인구 : 28만 1천 1백 60명 4년 후 : 47만 7백 50명, 해방 후 귀환동포의 정착 6.25 동란 후 1951년 : 84만 4천 1백 34명, 피난민 유입 1960년 : 116만명으로 증가 당시는 30만을 수용할 기반시설, 좁은 도로와 산중턱의 판자촌이 난립한다. 경상남도 관할의 일개 시의 위치에서는 일반 행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별시 승격문제는 6.25동란 이전에 이미 논의 되고 있었다. 1949년 6월 14일 당시 시장이던 정종철, 부산상공회의소 김지태, 동회연합회 회장 김용준 이 주축이 되어 각계 인사와 함께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회(釜山特別市 昇格 期成會) 준비위원회..
4. 백자 달항아리 : 2007년 12월 17일 국보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백자 달항아리는 보통 높이가 40cm이상 되는 대형으로, 둥글고 유백색의 형태가 둥근 달을 연상하게 되어 일명 '달항아리' 라고도 불린다. 조선 17세기 후기~18세기 전기의 약1세기 동안(특히 18세기 전기 50년간) 조선왕조 유일의 관요인 사옹원의 분원 백자제작소(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광주 지역에 산포해 있던 340여 개소의 가마 가운데 금사리가마에서 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가 43.8cm, 몸통지금 44cm크기로 유약과 태토의 용융상태가 우수하며 입 지름과 바닥 지름의 비가 이상적 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보인다. 완전한 좌우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어지고 변형된 상태가 전체의 조형에..
1. 동궐도(東闕圖) : 2013년 11월 13일 국보 제249-2호 변경 지정되었다. 동아대 석당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동궐도는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을 함께 그린 그림으로 거대한 궁궐과 산수가 어울져 일대 장관을 보여준다.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며, 이와 똑같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동궐도 등과 비교해 볼 때 원래 16개의 화첩으로 되어 있었던 것 임을 알 수 있다. 비단에 먹과 채색을 썼고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제작연대는 1826~1831년 사이로 본다. 당시의 궁궐배치나 실제 했던 건축물과 각종 시설, 조원의 원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2. 심지..
Political leaders who carried on the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Japan`s colonial rule formed a number of political parties and organizations after liberation, calling for establishing a unified independent government on the Korean peninsula. In 1947, the US submitted the issue of Korean independence to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The UN adopted the American resolution and decided to e..
조선 후기에는 통신사의 파일(派日) 이외에 조정의 예조참의 명의로 대마도 도주에게 보내는 사절(使節)이 있었다. 이 사절은 대마도와의 외교 현안을 다루는 실무적인 사행(使行) 이었기에 문위역관(問慰譯官)이라 했다. 이들은 역관사(譯官使)라고도 했는데 사역원(司譯院)의 일본어 통역관인 왜학역관(倭學譯官)이 정사(正使)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위역관은 1636년(인조14년) 역관 홍의남 일행의 파견을 계기로 1860년(철종11)까지 224년 사이 54차에 걸쳐 파견되었다. 이 문위역관이 통신사 보다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대마도가 대일외교의 창구가 되었고 대변자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정에 어두웠던 토쿠가와 막부는 통신사의 내방에만 관..
During the conflict, tens of thousands of women - some say as many as 200,000 - from across Asia were sent to military brothels to service Japanese soldiers. Many of the victims, known as "comfort women", were Korean. Many young girls were kidnapp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and were forced to serve as a " Comfort woman " (sexual slavery) of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war. The ones who s..
17~19세기 일본인 마을 왜관 세 곳 1.절영도왜관(1601~1607 영도구 대평동) 2.두모포왜관(1607~1678 동구 수정시장) 3.초량왜관 (1678~1876 중구 용두산 일대) 두모포 왜관이 좁고 습해서 500~1000명 가량의 일본인 살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이에 초량 왜관으로 이전한다. 지금의 지명 '고관' 은 예전 두모포 왜관이 있던 자리 '구관' 을 말한다. 초량왜관(신관)1675(숙종1년) 3월 착공 했다. 대마도에서 사지모쿠자에몽이 기술자 150명 데리고 왔다. 3년만인 1678(숙종4년) 4월에 완공했다. 주변 민가는 지금의 상해문 부근에 설문을 세우고 설문 밖 부산역 건너편으로 이전 시킨다. 건축 자재는 조선에서 제공했다. 집집마다 목욕탕을 건설하는 모습에 씻기 싫어하던 조선 사..
태종대는 영도구 동삼동 산 29의 1에 위치한 1,793,026제곱미터 임야이다. 1972년 문화재 기념물 제28호로 지정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 태종대는 동래부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절영도(영도) 동쪽에 있다. 바닷물이 둘레를 돌고 하나의 돌다리가 있어 노니는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다.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조왕이 이곳에서 포장과녁을 두고 활을 쏜 곳이라 하여 그리 이름 했다 한다. 가뭄이 나면 이곳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 라는 기록이 전한다. 태종대는 영도 태종대 등대가 있는 그 등대에서 바위절벽을 따라 남쪽으로 50m쯤 돌면 바다 위에 나란히 선 넓고 반반한 대(臺)가 둘 있다. 그 대가 태종대다. 돌다리는 절벽에서 굴러내린 바위가 절벽 사이에 낀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