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이야기

17~19세기 일본인 마을 왜관 세 곳


1.절영도왜관(1601~1607 영도구 대평동)
2.두모포왜관(1607~1678 동구 수정시장)
3.초량왜관 (1678~1876 중구 용두산 일대)

두모포 왜관이 좁고 습해서 500~1000명 가량의 일본인 살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이에 초량 왜관으로 이전한다.

지금의 지명 '고관' 은 예전 두모포 왜관이 있던 자리 '구관' 을 말한다. 초량왜관(신관)1675(숙종1년) 3월 착공 했다.
대마도에서 사지모쿠자에몽이 기술자 150명 데리고 왔다. 3년만인 1678(숙종4년) 4월에 완공했다.

주변 민가는 지금의 상해문 부근에 설문을 세우고 설문 밖 부산역 건너편으로 이전 시킨다.

건축 자재는 조선에서 제공했다. 집집마다 목욕탕을 건설하는 모습에 씻기 싫어하던 조선 사람들 놀랐다 한다.

처음으로 미닫이문이 들어 왔는데 당시로는 하이테크기술을 일본에서 가져온 셈이다.

이 때 부터도 반도체 부품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와는 조선 것을 썼다 한다.
용두산 뒷 편에 있는 지금의 기상관측소가 있는 산은 복병산 이라 부르는데, 당시 왜관 주변을 둘러싸고 통행을

금지 하는 표시를 붙이고 6곳에 복병을 배치 해서 그리 불린다 한다.
일설에는 용두산이 고작 해발50미터 이지만 호랑이가 출몰하곤 했단다.
복병산 줄기를 타고 왔다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혼줄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두산을 기준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고 용두산 아래 '신당' 이라는 신사가 있었다.

신사 동관에 '동향사' 라는 절 있었고 그 안에 '부산요' 라는 한일 합작 도자기 공장이 있었다.
대마도 도주가 주로 주문을 했는데 본토의 막부에 보내기 위해서 였다 한다.
일본에서 조선의 매(hawk)의 수요가 많아 매를 길러서 일본에 보내는 관청 '응방' 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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