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나고 258년이 지난 1849년 10월, 경상 좌수사 이형하가 지금의 수영(水營)으로 부임해 왔다. 이듬해 1850년 8월 20일 정3품 통정대부 행절도사 승정원우부승지로 제수되어 한양으로 올라가기 까지 동래부 좌수영 전반에 걸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내영지(동래영지) 서문에는 개인의 공적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안타까워 하는 심정을 토로 하면서 저술의 목적을 밝힌다. 족인, 현도, 책실(비서) 의 도움으로 기록 했다 전한다. 서문에 좌수영성 군사기록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분들의 기록에 기첩과 무명의 백성에 이르는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두 기녀가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듣게 된다. 여기서 '기첩' 이란 기생 출신의 '첩' 인지 특정인 의 '애첩' 인..
부산 근교에 만들어진 포진지는 가덕도(외양포), 오륙도(장자등), 장승포(지심도)가 있고 진지로는 민락동에 한 곳 있다. 장자등 오륙도 포진지 세계1차 대전으로 세계와 척을 진 일본이 공해상의 요지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대국들이 본토를 위협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이기대 해안선을 갈라서 한국인 노역자를 동원해서 16년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했다. 산자락을 잘라서 콘크리트 구조의 포진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소나무를 심어서 이전과 같은 산의 형태로 위장했다. 식민지 지배부터 해방까지 소나무가 울창해서 하늘에서 봐도 식별이 어려웠다. 일제시대 만들어진 포진지 6개소 중 2곳은 해방 후 파괴었고 지금은 4개소가 남았다. 1905년 이후 요새화 되었다. 410..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북으로는 장봉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그 기슭으로 옥천이 흐르고, 남으로 태평양위로 오륙도가 보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때 방어의 요충지로 포진지가 있었고 모두 11개의 굴이 있었지만 허물어 버렸다. 43cm 대형포는 광복후 미군에 의해 부수어졌고 진지터는 굴안에 남아 있다. 2005년 11월 용호농원에 거주하던 한센씨 가족은 62가구 119명 이었다. 이들의 치료와 보호는 1909년 감만동 한센병원에서 시작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관심으로 1911년 부터 감만동 상애원(相愛園) 한센병원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재활과 치료를 맡았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득세는 신앙의 전파와 이와 연계된 의료사업에 지장을 가져왔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당시 군용지였던 용호동 산 2번지 부근인..
용호동 936번지에 위치하고 1972년에 문화재 기념물 22호로 지정되었다. 육지로부터 가까운 것 부터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으로 나뉜다. 12만년 전까지 육지에서 이어진 반도 였다. 침식으로 육지에서 분리된다. 오륙도는 방패섬과 솔섬 중 허리 아래가 붙어 있어 밀물때 하나로 보이면 우삭도, 썰물때는 두 개로 나뉘어 방패섬, 솔섬이 된다. 동래부지에는 동(東)에서 보면 봉우리가 6개, 서(西)에서 보면 다섯개가 되어 그리 이름 한다 했다. 셋째 봉우리(수리섬)에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던 장수 만세덕의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기록에는 당나라 장수라고 되어 있으나, 명나라 장수 일 것이다. 당나라 군대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이런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방패섬은 방패..
이기대 산책로 사업은 2006~2011년 까지, 이기대 도시 자연 공원 일원이 정비된다. 1. 방패섬 : 백악기 역암층, 넓이 8미터, 길이 14미터, 13미터 해식애, 대조(大潮)에 파식대가 잠긴다. 솔섬과는 너비 1미터 높이 9미터의 해식 동굴로 분리되어 있다. 썰물때 파식대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5도가 된다. 18종류 식물이 산다. 보리사초, 참억새... 2. 솔섬 : 방패섬과는 너비 1미터 높이 9미터의 해식동굴로 분리 , 높이 32미터 역암층, 62종의 식물이 산다. 0.005제곱키로미터로 4미터의 곰솔이 자란다. 보리장나무가 우점종 이다. 3부 이하에는 파도 때문에 식생이 거의 없다. 3. 수리섬 : 세번째 섬, 0.003제곱키로미터, 높이 33미터, 백악기 역암, 사암 3단의 융기 파식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