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호 조선소 였다. 우리나라는 현재 2022년 세계 선박 발주량의 37% 를 수주한다. 고부가가치 친환경선박 점유률은 세계 1위이다.1876년 개항하면서 부산항유입 선박이 많아졌다. 선박건조 수리위한 조선소가 필요했다.1887년 고베출신 조선 사업가 다나카 오카타로는 영도에 '타나카' 조선소를 설립하여 목선제조업을 시작했다.1892년 나카무라 조선소, 1887~1937년 까지 종업원 5명 이상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조선소가 영도 대평동 일대만 30개 이상 이었다.1922년 3월 오토모 요신이 설립한 '조선선거공업주식회사' 가 바로 '대한조선공사' 의 시초이다.원래 부산 대평동은 본래 ' 바람이 이는 것 처럼 기운차게 일어난다 ' 뜻의 "풍발포" , "대풍포" 라 불리던 곳이다. 나중에 바람이 잔잔..
1.용두산공원 :1973년 서울타워 보다 2년 앞서서 전국체전 기념으로 만들었다. 상층부는 다보탑, 1955년 이순신 동상도 세운다. 광화문 이순신 보다 앞서서, 주변지명을 충무동, 광복동으로 바꾼다. 일제의 기를 누르기 위해서다.2. 부산근대역사관 : 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설되었다. 1910년 마산에 출장소 세웠다가 1921년 부산지점 완성되자 마산지점 폐쇄한다. 모두 여덟군대의 지점, 남아 있는 곳은 목포, 부산 두군데이다. 목포도 근대역사 박물관으로 쓰인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의 국책회사, 1911~1927년까지 9천호의 일본 농부가 이주한다. 이후 소작료를 받는 지주회사화 된다. 사업변경하고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 1917년 본사를 동경으로 옮기고1937년 중일 전쟁이 발..
1960년 4.19의거를 거쳐 7.29 총선거로 새로 소집된 국회에서는 자유당의 강압적 전횡으로 개악된 지방자치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 들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출신 민의원 이만우 외 23명이 도와 서울특별시 이외 인구 100만 이상은 정부 직할시로 한다는 개정 지방자치 법률안을 제안 그러나 역시 부결되었다. 5.16혁명 후인 1961년 9월 내무부 장관의 고문이던 한태연이 직할시 승격에 관한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1962년 5월 22일에는 혁명정부에서 부산시의 정부직할시 승격의 필요성 여부의 구체적인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최고회의 내무분좌 위원회 위원 및 내무부 당무자가 부산으로 내려와 실정을 조사하였다. 이로써 직할시 승격의 정당성이 구체화 되었다. 1962년 9월 5일 내무부에..
경상남도 관할아래 있던 부산시가 정부 직할시로 승격한 것은 1963년 1월 1일이다. 광복을 본 그 해 부산의 인구 : 28만 1천 1백 60명 4년 후 : 47만 7백 50명, 해방 후 귀환동포의 정착 6.25 동란 후 1951년 : 84만 4천 1백 34명, 피난민 유입 1960년 : 116만명으로 증가 당시는 30만을 수용할 기반시설, 좁은 도로와 산중턱의 판자촌이 난립한다. 경상남도 관할의 일개 시의 위치에서는 일반 행정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별시 승격문제는 6.25동란 이전에 이미 논의 되고 있었다. 1949년 6월 14일 당시 시장이던 정종철, 부산상공회의소 김지태, 동회연합회 회장 김용준 이 주축이 되어 각계 인사와 함께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회(釜山特別市 昇格 期成會) 준비위원회..
4. 백자 달항아리 : 2007년 12월 17일 국보 제310호로 지정되었다. 백자 달항아리는 보통 높이가 40cm이상 되는 대형으로, 둥글고 유백색의 형태가 둥근 달을 연상하게 되어 일명 '달항아리' 라고도 불린다. 조선 17세기 후기~18세기 전기의 약1세기 동안(특히 18세기 전기 50년간) 조선왕조 유일의 관요인 사옹원의 분원 백자제작소(경기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광주 지역에 산포해 있던 340여 개소의 가마 가운데 금사리가마에서 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가 43.8cm, 몸통지금 44cm크기로 유약과 태토의 용융상태가 우수하며 입 지름과 바닥 지름의 비가 이상적 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보인다. 완전한 좌우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어지고 변형된 상태가 전체의 조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