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순신 동상 :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 되었다. 용두산 공원 이순신 동상은 높이 12m로, 1955년 12월에 시비+도비+시민성금 으로 세워 졌다. 2. 부산탑 : 서면 로타리에 있었다. 1962년 12월에 착공--->1963년 12월 건립 되었다. 1981년 7월 부산 지하철 1호선 공사로 탑신이 철거되었다. 탑 중앙에 위치 했던 남녀 동상은 지금은 부산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3. 전적지 정화사업 : 1977~1978년사이, 정발장군(1977), 송상현동상(1978)이 세워졌다. 중앙공원 충혼탑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후 순직한 부산출신 국군장병, 경찰, 애국 전몰 용사를 기리기 위해, 1957년 지금의 부산,경남 출신들을 모셨다. 1983년 9월 경남..
1973년 패총이 발견 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1876년 개항당시 이 섬에 인가가 예닐곱채 쯤 있었다는 기록, 어느 해 대구의 황금어장으로 각광 받으며 돈이 몰렸다. 한국전쟁 이후 악명 높은 밀수왕국으로 불리고 1967년 정부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섬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어업자금도 융자하여 바다목장 양식장 등으로 새로운 면모를 갖춘 마을로 활기를 찾지만 1968년 해양대학교 입주가 결정나고 주민들이 뭍으로 떠나야 했다. 1970년 3월 섬을 비울 때만 해도 아치섬에는 108세대 680여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본교였던 조도국민학교가 폐교조치가 있었고 그 해 5월에 학교 문을 닫았다. 아치섬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1740년 간행된 에는 고지도, 동백..
영도구에는 개안마을, 석말추마을, 대풍포마을 등 7곳에 어촌이 발달했다. 남항동의 개안 마을은 해안을 매립하면서 갯벌을 메워 그 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갯바닥을 메워 만들어진 마을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고 현재의 위치는 남항동 3가 이 있던 곳이다.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민가가 있었고, 40여년 전에 마을의 흔적이 없어졌다. 석말추 마을은 남항동의 해안에 입지하였으며, 지명은 해안에 분포한 이암離岩에서 비롯 되었다. 석말추 앞 바다는 어장으로 유명하였으며 석말치, 섬돌추, 성발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평동의 대풍포 마을은 매축되기 이전에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해안지역의 만입부에는 바람을 기다리는 곳, 혹은 바람을 대피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대풍待風'-- 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지명이 많..
1. 용두산타워 : 1973년 서울타워 보다 2년 앞서서 전국체전 기념으로 만들었다. 이때 꽃시계도 함께 만들었다. 상층부는 다보탑 모양을 땄다. 1955년 12월에 시비, 도비, 시민성금을 모아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 있다. 1968년 4월 27일 세워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보다 앞선다. 일제 시대는 신사가 있던 자리다. 해방 후 주변지명을 충무동, 광복동으로 바꾼 이유는 일제의 기를 누르기 위함이다. 2. 부산근대역사관 : 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설되었다. 1910년 마산에 출장소 세웠다가 1921년 부산지점 완성되자 마산지점이 폐쇄 되었다. 모두 여덟 군데의 지점이 세워졌고 남아 있는 곳은 목포, 부산 두 군데이다. 목포도 근대역사 박물관으로 쓰인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