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동, 동광동, 대청동, 보수동,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영주동 등이다. 10개동이다. 1. 광복동 : 숙종 4년(1678)에 설치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 체결될때 까지 198년간 존속한 곳이다. 광복동이라는 동명은 개칭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했던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그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광복동이라 이름 붙여졌다. 2. 대청동 :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에 있던 연향대청에서 유래했다. 연향대청은 일본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여 동래부사나 부산 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이라 불렀다. 현재의 광일초등학교자리 이고 강점기때는 대청정으로 불렸다. 이후 광복후 대청동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3. 남포동 : 용두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남포 일대의 바닷가를 자갈치라..
일본 음식중에서도 초량왜관의 조선인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스기야키' 였다. 오늘날의 스기야키는 철로 만든 냄비에 소고기와 파 등을 넣고 일본간장, 술, 다시마로 간을 한다. 당시의 스기야키는 삼나무로 만든 상자나 판자가 필요했다. 일본에서 흔한 삼나무로 상자를 만들어 하룻밤 물에 담가두었다가 불 위에 올려 음식을 조리하면, 삼나무는 타지 않고 안에 있는 움식이 익는다. 당시 스기야키는 국물이 있는 ' 스기바고야키杉箱焼き' 와 국물이 없는 '스기이타야키杉板焼き' 두 종류가 있었다. '스기바코야키' 는 삼나무로 만든 상자가 필요했다. 삼나무 상자 안에 육수를 붓고 된장을 풀어 끓인다. 여기에 각종 채소나 생선을 넣어 먹었다. '스기이타야키' 는 삼나무로 만든 판자를 숯불 위에 올려놓고 재료를 구워 ..
영도대교는 1934년 11월23일 10시30분 개통했다. 신관의 인솔하에 부산의 소학교 우수학생 280명을 선발해서 반은 영도에서 출발하고 반은 부산에서 출발해서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뒤이어 관민 유력자 500명이 건너고 마지막에 아이들이 일장기 흔들면서 행진했다. 1876년 개항 후 인구가 증가하고 싼 주거지를 찾던 일본인 한국인들이 영도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1920년 대에 들어서면서 자갈치, 영도사이 배편을 이용하는 사람이 한 달에 3만5천명에 이른다. 공사는 힘들었다. 호안매립공사로 중국인 한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고 본 공사때도 목숨을 잃었다. 원혼이 떠돌고 곡소리가 난다해서 영도구 남항동에 용신당을 만든다. 중구 영선고개에 영도다리 사상자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이 투신하..
(1) 용두산 포함해서 10만평이 전관거류지(동광, 중앙, 광복, 남포) , 부산항은 1902~1913년까지 매축공사가 행해 진다. 자갈치, 중앙동, 부산진, 자성대앞, 55보급창고, 감만동 일제시대때 1~4 부두까지 만들어졌다. 1910년 인구 4만3천명, 패망무렵 35만명이 된다. 1925년 진주에서 경남도청이 이전해 왔다. 한국전 당시 유엔군과 구호품 운송에 용의 했다. 1970년 중반까지 1~4부두 사용, 1974부터 자성부두, 2001년 부터 우암, 감만, 신선대부두 가 컨테이너 전용부두로 쓰인다. 1980년 부산도시고속도로, 1994년 동서고가도로,1963년 직할시 로 승격했다. 영도 대평동, 1912년 대평초등학교, 1925년 다나카 조선소, 60여개의 조선소가 있었다. 1960~1980년대..
감천의 옛 이름은 감내, 감은 '검' 에서 온것, 검은 '신' 을 의미한다. 감내내리, 감내래리 라고 한다. 처음엔 40여채가 6.25를 거치면서 1955년 부터 피난민과 태극도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기 시작한다. 태극도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출신의 정산 조철제가 일으킨 종교다. 조철제는 신비한 체험을 한후 전국 각지를 돌며 포교 활동을 한다. 충남 태안, 전북 정읍이 본거지다. 증산도 창시자 강일순의 누이 동생과 만나서 1921년 무극대도 교단을 창립한다. 1936년 조선총독부 으로 교당건물이 철거되고 1948년 본부를 보수동으로 이전하고 태극도로 교명을 바꾼다. 6.25가 끝난후 1955년 부산시에서 도시개발을 위해서 도심 한복판의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3천가구 1만여명이 감천으로 집단이주한다. 감천 ..
1. 낙동강 교통의 집산지 구포: 1682년 구포는 세곡의 집산지로 감동항, 남창, 양산, 동래, 김해 일대로 물건을 보냈다. 에 보면 감동포는 일명 구복포(거북이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의 의성산) 북구 화명빙상장 2. 동아대 설립자 정재환 박사: 유일한 전차 제494호, 부산근처에서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것은 1915년 당시 전차의 속도가 시속40km였다. 멀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52년 미국으로 부터 원조물자로 전차 40량을 받아서 서울과 부산에 운행했다. 1950년대 부터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3. 아미동: 비석마을, 귀신 출현한다 했다. 구한말까지 '아미골' , '타니마치' 라 불렀다. 공동묘지 타니마치 산다하면 뺨 맞는다 했다. 부산의 농악이 탄생한 곳이고 세계참피언 장정구도 아미동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