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0년 부터 왜구가 창궐한다. 1380년 이성계가 남원에서 토벌했다. 1389년 위화도 회군을 같이한 박위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하게 한다. 1396년에 정벌 명령 있었고, 1419년 세종때 이종무가 정벌하고 회유책도 쓴다. 경상도에만 왜인 2천명이 정착한다. 1426년 삼포(부산포: 지금의 부산 동래구, 제포: 창원시 진해구, 염포: 울산 방어진)를 연다. 1510년 삼포왜란 발생하고 왜관을 폐쇄한다. 1512년 제포왜관 연다, 1521년 부산포왜관을 연다. 1544년 왜인들의 난동이 있어 부산포 왜관만 설치 운영한다. 초량왜관 : 임란 후 1607년 조선통신사-->1609 광해 1년 기유약조로 두모포 왜관(부산동구 수정동) 설치되었다. 두모포 왜관이 좁아서 1678년 초량왜관 설치된다. 용두산일대 ..
부산이라는 지명은 원래가 부산(富山)이라는 산아래 위치한 포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부산포의 명칭은 1469년 12월(성종 즉위 한달 뒤) 부자 부富의 부산에서 가마 부釜로 변경되었다. 협의의 범위로는 현 동구 좌천동에서 범일동 일대 바닷가 지역을 의미한다. 부산이라는 산이 좌천동 뒷산(증甑산) 임을 유추 할 수 있다. 부산의 산이 증산(甑山)이 된 이유는 임란당시 왜군이 쌓은 왜성이 무너지고 보니 그 모양이 시루와 같아서 그리 지었다 한다. 부산은 15개 구와 1개군(기장군)으로 구성된다. 개항전까지는 동래도호부가 설치된 동래지역이 중심지 였으나 개항 후 항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현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 지역이 부산부 지역 이었고 동래구, 금정구, 부산진구, 사하구, 해운대구, 남구, 북구..
중앙동, 동광동, 대청동, 보수동,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영주동 등이다. 10개동이다. 1. 광복동 : 숙종 4년(1678)에 설치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 강화도조약 체결될때 까지 198년간 존속한 곳이다. 광복동이라는 동명은 개칭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했던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그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광복동이라 이름 붙여졌다. 2. 대청동 :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에 있던 연향대청에서 유래했다. 연향대청은 일본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여 동래부사나 부산 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이라 불렀다. 현재의 광일초등학교자리 이고 강점기때는 대청정으로 불렸다. 이후 광복후 대청동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3. 남포동 : 용두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남포 일대의 바닷가를 자갈치라..
일본 음식중에서도 초량왜관의 조선인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스기야키' 였다. 오늘날의 스기야키는 철로 만든 냄비에 소고기와 파 등을 넣고 일본간장, 술, 다시마로 간을 한다. 당시의 스기야키는 삼나무로 만든 상자나 판자가 필요했다. 일본에서 흔한 삼나무로 상자를 만들어 하룻밤 물에 담가두었다가 불 위에 올려 음식을 조리하면, 삼나무는 타지 않고 안에 있는 움식이 익는다. 당시 스기야키는 국물이 있는 ' 스기바고야키杉箱焼き' 와 국물이 없는 '스기이타야키杉板焼き' 두 종류가 있었다. '스기바코야키' 는 삼나무로 만든 상자가 필요했다. 삼나무 상자 안에 육수를 붓고 된장을 풀어 끓인다. 여기에 각종 채소나 생선을 넣어 먹었다. '스기이타야키' 는 삼나무로 만든 판자를 숯불 위에 올려놓고 재료를 구워 ..
영도대교는 1934년 11월23일 10시30분 개통했다. 신관의 인솔하에 부산의 소학교 우수학생 280명을 선발해서 반은 영도에서 출발하고 반은 부산에서 출발해서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뒤이어 관민 유력자 500명이 건너고 마지막에 아이들이 일장기 흔들면서 행진했다. 1876년 개항 후 인구가 증가하고 싼 주거지를 찾던 일본인 한국인들이 영도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1920년 대에 들어서면서 자갈치, 영도사이 배편을 이용하는 사람이 한 달에 3만5천명에 이른다. 공사는 힘들었다. 호안매립공사로 중국인 한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고 본 공사때도 목숨을 잃었다. 원혼이 떠돌고 곡소리가 난다해서 영도구 남항동에 용신당을 만든다. 중구 영선고개에 영도다리 사상자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이 투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