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안 입지 마을 1 (부산진구, 남구)

부산진구 전포동 '밭개' 마을은 동천 하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배가 이곳까지 왔다. 전포라는 지명은 `밭개` 를 한자 화 한

지명이다.
남구에는 7곳의 어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감만 1동 285번지 일대에는 '모래구찌' 마을이 있었는데, '모래' 라는 단어와 입구라는 일본말 '구찌' 를 붙여 유래된 지명이다. 소규모 어업이 이루어진 곳으로 연합철강과 8부두 등이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감만동 일대에 있었던 '적기' 마을은 흙 빛깔이 붉다 하여 붙인 이름, 1982년 감만동에 편입되면서 없어졌고 일상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대연동의 석포 마을은 일명 돌이 많은 포구라는 의미로 돌개라고 불렀다. <신동국여지승람> (1530) 이곳에 목장이 설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을 형성의 역사는 깊다. 1950년대 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지금도 교회나 교육기관등에 석포 이름이 남아 있다.
대연3동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남쪽 바닷가에 있던 사분포 마을은 하천을 낀 포구에 입지 했다. 넓은 갯벌이 발달해서 천일제염 하기 적당했다. 네 곳의 염전이 있다 해서 사분포, 사분개라 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발달했다.
용호동 소재 분개 마을도 염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지금의 용호2동, 용호3동의 위쪽 부분, 옛 동국제강(지금은 LG메트로시티)이 들어서 있는 자리 근처다. '분개' 라는 지명은 바닷물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 모양의 염전이 있는 갯벌이란 뜻에서 유래 했다 한다.
조선시대 이곳에 염전분이 24곳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6곳으로 정리 되었다. 당시는 부산일대의 대표적인 염전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이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까지 판매 되었다. 제조업과 식염행상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았고 광복 후에도 소금을 생산하였으나 도시화로 소멸된다.
용당동에 소재한 용당 마을은 마을 형성 당시 포구였다. 한말부터 용당포에는 일본인 어업자의 이주 어촌이 형성되었다. 1908년 일본 야마구찌현에서 이주한 일본인이 15호, 60명 정도가 어촌을 형성하고 살았다. 어전 어장이 6개소, 갈치조업도 하였다. 주요 수산물은 청어, 멸치, 미역 등이다. 이곳에 일본 야마구찌현 수산조합이 경영하는 이주 어촌이 있었다. 이주한 일본인이 16호, 53인 이었다. 이들은 수조망어업, 도미, 붕장어의 연승 및 일본조어업에 종사 하였다. 1964년 동명목재가 들어서면서 소멸되었으나 지명은 법정동 으로 남아 있다.
현재 우암동의 제7부두 자리에 소재했던 우암 마을은 포구에 입지하여 좋은 항구 기능을 했다. 지명은 포구에 있는 바위가 소 모양을 닮았다해서 유래 했다. <한국수산지> (1910)에 '우암포는 석남면에 위치한 주요한 어촌으로 인가는 20호 정도였다. 연안에 일본 수조망 어선이 고기 잡으러 많이 온다' 도시화 이후 마을은 없어졌으나 동리 지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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