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성곽.조계 관련 마을

조선시대 중요한 관방 이었던 동래부 지역은 해안을 중심으로 성곽이 축조 되었고 마을도 형성 되었다. 개항후 왜관을 중심으로 조계지가 구획 되었고, 갑신정변후 청나라 조계지도 생겼다.


영주동 청관마을은 중구 영주1동, 5 , 9 ,11번지 일대와 동구 초량1동 562-3번지 일대로 조계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인 마을이다. 청나라 영사관이 설치된 것은 1884년 5월경 이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자 관리나 주민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일부 남은 주민과 재산은 서울의 영국 총영사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이후 1913년 청국 조계지는 폐쇄 되었지만, 소유권을 인정받아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이 청국인의 계류지를 일본인은 '중국인의 거리' 라 하여 '시나마찌' 라고 불렀다. 광복 후에도 중국인들이 계속 이곳에 거주 하면서 차이나타운을 건설하였다. 영사관이 있던 자리에 화교중,고등학교가 개교됨으로써 중국인 거리가 활기를 찾는다.


부산진구 당감동의 성안 마을은 동평현에 있던 동평성 안에 있던 마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의하면, '동평성은 동래부 남쪽 20리에 있는데, 동남은 석축이고, 서북은 토성으로, 둘레는 3508 척 이라 하였다. 이 동평성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성안 마을 혹은 성내 마을 이라 하였다. 현재의 당감동 6~7 통에 해당한다.


양정동에 소재하였던 신좌수영 마을은 현재 전포동에서 거제동.양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신좌수영고개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송상현공 동상의 서쪽 자리에 과거에 전차 정류장이 있었는데, 이를 신좌수영정류장이라 하였다. 이 전차 정류장 부근으로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 좌수영이 일시 옮겨졌다가, 다시 지금의 수영으로 옮겨졌다. 개운포에 있던 좌수영과 대비하여 새로 생긴 좌수영이라 하여 신좌수영 이라고 하였다.


남구 감만동 감만 마을은 '감만' 이라는 말은 '무찔러 이긴다' 는 '감' 과 '오랑캐' 를 의미하는 '만' 이 결합된 의미이다.

조선시대 1635년(인조13년)부터 1652년(효종3년)까지 이곳에 있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근에 형성된 마을이다.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쪽으로 유인해서 전멸시켰다는설이 있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태종 때 울산 개운포에 있었으나 임란 직전 수영으로 옮겨졌다가, 임란 직후 인조 13년(1635) 에 수영구 감만으로 옮겨와 수군이 주둔했었다.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국가 비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해서 효종 3년(1652) 다시 수영으로 이전 했다.

 <가호안>(1904년) 에 의하면, 당시 감만동의 호수는 30호였다.


동구 수정동에 위치한 고관 마을은 당시 이곳에 있었던 두모포 왜관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부산에 1407년(태동 7년) 왜관이 처음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쇄 되었다. 1601년 절영도에 임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후 1607년 이곳에 다시 왜관을 설치 하였다. 두모포 왜관은 규모가 1칸을 1보로 계산하여, 동서 126보, 남북 63보이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남.북.서쪽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문 밖에 좌천이 흐르고 있었다. 두모포 왜관은 1678년 왜관을 새로 초량으로 옮길 때까지 70년간 존속하였다. 왜관을 옮긴 후 신관인 초량왜관에 대해 두모포 왜관을 구관(고관)이라 하였다.


영도구 영선동의 석탄고 마을은 한말 이곳에 일본이 석탄 저장고를 설치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청학1동 봉학초등학교 뒤쪽 일대 지역이다. 1876년 부산에 일본 조계지가 설치된 후 1885년 조선측과 조약을 체결하여 절영도 흑석암 일대(현재 청학동)의 70칸, 4900평을 해군 전용의 저탄창고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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