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아치섬

1973년 패총이 발견 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1876년 개항당시 이 섬에 인가가 예닐곱채 쯤 있었다는 기록, 어느 해 대구의 황금어장으로 각광 받으며 돈이 몰렸다. 한국전쟁 이후 악명 높은 밀수왕국으로 불리고 1967년 정부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섬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어업자금도 융자하여 바다목장 양식장 등으로 새로운 면모를 갖춘 마을로 활기를 찾지만 1968년 해양대학교 입주가 결정나고 주민들이 뭍으로 떠나야 했다.
1970년 3월 섬을 비울 때만 해도 아치섬에는 108세대 680여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본교였던 조도국민학교가 폐교조치가 있었고 그 해 5월에 학교 문을 닫았다.
아치섬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에는 고지도, 동백도로 기록 되어 있다. 임진왜란때 부산포해전에서 왜군이 아치섬에 주둔했는데 왜군의 깃발을 끌어 눕혔다 하여 '눕힐 와(臥)' , '표기 치(幟)' 를 써서 와치도(臥幟島)라 불렀는데 전음이 되어 '아치섬' 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섬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장엄미가 부산에서 제일이라해서 조도(朝島)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전한다. 박돈목씨는 생전에 '아치' 란 '작고 아름답다' 는 순수한 우리말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975년 중리에 위치하던 해양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이 섬으로 이전해 오면서 아치섬 사람들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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