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의 옛 이름은 감내, 감은 '검' 에서 온것, 검은 '신' 을 의미한다. 감내내리, 감내래리 라고 한다.
처음엔 40여채가 6.25를 거치면서 1955년 부터 피난민과 태극도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기 시작한다.
태극도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출신의 정산 조철제가 일으킨 종교다. 조철제는 신비한 체험을 한후 전국
각지를 돌며 포교 활동을 한다. 충남 태안, 전북 정읍이 본거지다.
증산도 창시자 강일순의 누이 동생과 만나서 1921년 무극대도 교단을 창립한다.
1936년 조선총독부 <유사종교해산령> 으로 교당건물이 철거되고 1948년 본부를 보수동으로 이전하고 태극도로 교명을 바꾼다. 6.25가 끝난후 1955년 부산시에서 도시개발을 위해서 도심 한복판의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3천가구 1만여명이 감천으로 집단이주한다.
감천 마을의 한자 감자를 따서 '감(甘)' 자 모양으로 구획한다. 옥녀봉쪽 1~4감, 태극도 본부중앙 5감, 본부 천에서 산자락 6~9감 계단식주택 배치로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다.
1958년 교주 조철제가 사망하고 아들 조영대가 교단을 이끌지만 교단은 분파되고, 교세는 위축, 감천마을은 쇠락해서 1천여명 남짓이 된다. 조철제의 제사가 있는 날은 전국에서 교도들이 모인다.
2009년 부터 문화체육관광부 미술프로젝트 '꿈꾸는 부산의 마추픽추'(2006)-->미로미로(2010)-->샛바람 신바람(2011)-->방가방가 프로젝트(2012)
부산은 산악도시이다. 한국전 피난민 80만이 들어 왔다 당시 부산인구는 50만 이었다. 역에 내리면 종이쪽지에 이주할 장소를 지정 받았다.
대부분이 산-몇번지, 영도, 아미동, 감천으로 이주 했다. 부산인구의 3/1 이 산복도로 산다.
태극도는 1908년 조철제가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 구세주라 자칭하는 사람이 60명이 나왔다.
그중, 통일교 문선명, 기장 신앙촌 부천교, 태극도 조철제
태극도는 샤머니즘, 유불교, 도교 믹스다.
도교는 풍수를 중시, 감천은 음과양이 만나는 지형이다.
태극도에는 포령이라는 중간 간부가 있다. 집사이 간격이 없고 방1, 부엌1 이 다다. 빨래는 건너편 산 너머 웅덩이 까지 가서 애들데리고 도시락 챙겨가서 언덕에 말려서 해질녘 돌아 왔다.
9감 사이 계단을 만들고 계단끝에 화장실이 있었다.
8평짜리, 같은 크기로 색깔이 없이 늘어선 기차 처럼 보여서 기차마을 이라고 하기도 하고 태극도 마을 이라 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때도 고치지 않았다. 윗길은 두배로 넓혔다.
원주민들이 충정도 지역에서 이주해 왔고, 무학도통 한다해서 아이들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잘모르니 주민들이 말을 잘 들었다.
포령이 시키는대로 하고 가진 돈도 다써버리고 들어 오게 했다.
사하구 관광지는 다대포 뿐이니 여기를 살리기 위해 10년간 최선을 다했다. 구청장이 3일에 한번씩 왔다.
마을협의회에 3팀이 있다. 아티스트, 구청, 주민 으로 구성 되었다.
각 감마다 2개의 공회당이 있고 여기에서 기도를 올린다. 기도가 끝나면 집으로 바로가서 불을 끄라고 했다. 그래서 화재가 한번도 없었다. 포령말을 잘 들었다.
감천은 대문, 담장, 도둑, 화재, 화장실이 없다.
2009년 부터 문체부에서 실시한 콘테스트에 2개 당선, 금융지원 받고, 2013년 NHK, CNN, 르몽드 등 유수의 방송국이 방문했다.
메트로 폴리스 어워드, 마운틴 사이드 어워드, 도쿄 아사아 경관상...
핀란드 헬싱키에 비슷한 마을이 있다. 핀란드 대사가 2번이나 왔었다.
73년 즈음 인구가 3만이 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서구 출신이다. 9선이나 당선된 이유는 여기 주민들이 다 찍어 줬기 때문이다. 선거차가 여기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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