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는 통신사의 파일(派日) 이외에 조정의 예조참의 명의로 대마도 도주에게 보내는 사절(使節)이 있었다. 이 사절은 대마도와의 외교 현안을 다루는 실무적인 사행(使行) 이었기에 문위역관(問慰譯官)이라 했다.
이들은 역관사(譯官使)라고도 했는데 사역원(司譯院)의 일본어 통역관인 왜학역관(倭學譯官)이 정사(正使)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위역관은 1636년(인조14년) 역관 홍의남 일행의 파견을 계기로 1860년(철종11)까지 224년 사이 54차에 걸쳐 파견되었다. 이 문위역관이 통신사 보다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대마도가 대일외교의 창구가 되었고 대변자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정에 어두웠던 토쿠가와 막부는 통신사의 내방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그 외 조선과의 외교나 무역에 관해서는 대마도에 맡기는 실정이었다.
통신사가 막부의 쇼군에게 파견된 외교사절이라면 문위행의 임무는 대마번주의 경조사 참여와 번주 소오씨가 참근교대(參勤交代)를 하고 에도에서 쓰시마로 귀환한 것에 대한 축하였다. 이런 이유로 파견된 것이 1632년의 문위행이고, 이후 문위행이 정례화 된것으로 본다. 문위행이 정식 사절이 된 것은 대륙에서 여진족이 흥기하여 북방의 군사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이와 더불어 일본 정세의 탐색이 긴급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위행은 번주가 에도에서 머물다 쓰시마로 돌아 온 후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동정을 빨리 파악 할 수 있었다.
문위행을 파견할때도 수행원이 많았다. 당상역관, 당하역관, 군관, 반당(경호원), 수배, 선장, 도훈도(都訓導 :고을의 훈도를 이끄는사람), 서계색(書契色 : 사행중 글을 잘하여 계본을 정서하고 서계를 의논하는 일을 맡은 일명 서계색리), 예단색(禮單色 : 사행때 예단을 맡은 사람), 주방색(廚房色 : 사행때 주방을 맡은 사람), 호방색(戶房色 : 사행 중 세금 관련 업무를 보았던 구실아치, 사람), 소동, 소통사를 비롯 사령, 취수(吹手), 기수(旗手), 수척(水尺)들에 격군(格軍) 30명을 합하면 89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떠났다.
이 역관 일행이 오고 갈 때는 반드시 대마도의 사자가 와서 호송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의 체류기간은 짧으면 반달, 길어질 때는 4개월이나 되었다. 체류기간 중의 외교적 교섭은 물론 수 차례의 의식이 행해졌는데 하선연(下船宴), 별연(別宴), 상선연(上船宴), 서계다례(書契茶禮), 이정암다례,(以酊菴茶禮), 만송원다례(萬松院茶禮) 등의 6회의 향응접대를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다례 후에는 음식자리가 베풀어졌는데 통신사 일행에게 접대하던 일본 최고의 요리였다. 접대비용 일체는 대마도에서 부담했다.
역관사의 파견이 가장 빈번했던 때는 무역이 활발하여 대마도의 재정이 풍부했던 17세기 중엽부터 말기까지였다. 문위행의 대마도 파견에는 우호적이며 화려한 면도 있었지만 실제 교섭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이해가 대립되어 조절이 잘 안되어 마찰을 빚는 때도 있었다. 224년 동안 54차례나 있었다면 평균치로 하면 4년 만의 1회가 된다.
부산의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날씨가 고른 날에 출범해야 했다. 이 역관 사행도 서울에서 내려왔지만 부산 현지에서 나가는 인원도 많았던 것 같다.
대마도에서 이쪽 사신을 호송하기 위한 배들도 들어왔다. 통신사 행차보다는 규모가 적다 해도 문위역관이 떠날 때도 당시의 동래부의 관원이나 지방민은 그 모든 편의를 사행에 제공해야 했다.
문위행의 파견이 가장 빈번했던 때는 대조선 무역이 가장 번성하여 대마번의 재정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던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엽까지의 시기이다. 이후 무역이 쇠퇴하면서 횟수도 줄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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