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동북쪽에 자리 잡은 와우산(臥牛山183m)을 장산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와우산이라 불렀다. 이 산의 형제봉(대봉,소봉)이 소의 양쪽 귀(뿔)에 해당되고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의 갯가라고 하여 미포하고 불렀다. 미늘, 미암, 미포의 지명은 미포가 소가 누워 있는 산의 말미, 소의 꼬리에 해당해서 그리 불렀다. 미포에서 청사포로 가는 해안 산책로는 장군바위, 대밭끝, 문둥골짝 등 해안을 감싸고 도는 절경이 좋다. 해월정에서 대마도가 보인다. 문둥골짝의 유래는 구남벌 온정거리에 나병환자들이 밤에 운집하여 온천으로 목욕 치료하고 낮이면 좌수영의 나병 환자 단속으로 골짝으로 피신했다 하여 문둥골짝이라 불렀다. 와우산 기슭 동해남부선 철도(부산~경주 1934...
동백은 우리나라 남부와 일본, 중국에 자생하는 상록교목(常綠喬木)이다. 지역에 따라 10월부터 한 송이씩 피기 시작해서 3월에 절정을 이룬다. 오래 가는것은 4월을 넘기기도 한다. 꽃과 잎은 주로 관상용으로 쓰이고, 꽃은 염료, 잎은 녹차 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열매의 기름은 할머니가 비녀 머릿결 손질에 쓰시는걸 본 적이 있다. 동백은 부산시의 시화이자 시목이다. 동백꽃은 1970년 3월1일 시화(市花)로, 동백나무는 1970년 7월 1일 시목(市木)으로 지정 되었다. 동백꽃(camellia)은 베르디의 오페라 에서 유래했다. 원작은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이다. 일본에서는 '춘희' 로 번역 되었다. 오페라 의 여주인공 이름이 '비올레타', 동백의 꽃말은 '부디 내 사랑을 받아주오' 다. 동백은 브랜드..
1. 이순신 동상 :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 되었다. 용두산 공원 이순신 동상은 높이 12m로, 1955년 12월에 시비+도비+시민성금 으로 세워 졌다. 2. 부산탑 : 서면 로타리에 있었다. 1962년 12월에 착공--->1963년 12월 건립 되었다. 1981년 7월 부산 지하철 1호선 공사로 탑신이 철거되었다. 탑 중앙에 위치 했던 남녀 동상은 지금은 부산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3. 전적지 정화사업 : 1977~1978년사이, 정발장군(1977), 송상현동상(1978)이 세워졌다. 중앙공원 충혼탑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후 순직한 부산출신 국군장병, 경찰, 애국 전몰 용사를 기리기 위해, 1957년 지금의 부산,경남 출신들을 모셨다. 1983년 9월 경남..
In the past, Korean society was divided into a ruling class, called yangban, and a subjugated class, or sangmin. Koreans behaved humbly to maintain the social order. For example, when a scholar published a book, he usually inserted a sentence in the preface along the lines of " I wrote this book without very much knowledge and not a great deal of talent." This "self-humiliation" may seem strange..
부산 근교에 만들어진 포진지는 가덕도(외양포), 오륙도(장자등), 장승포(지심도)가 있고 진지로는 민락동에 한 곳 있다. 장자등 오륙도 포진지 세계1차 대전으로 세계와 척을 진 일본이 공해상의 요지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대국들이 본토를 위협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이기대 해안선을 갈라서 한국인 노역자를 동원해서 16년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했다. 산자락을 잘라서 콘크리트 구조의 포진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소나무를 심어서 이전과 같은 산의 형태로 위장했다. 식민지 지배부터 해방까지 소나무가 울창해서 하늘에서 봐도 식별이 어려웠다. 일제시대 만들어진 포진지 6개소 중 2곳은 해방 후 파괴었고 지금은 4개소가 남았다. 1905년 이후 요새화 되었다. 410..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북으로는 장봉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그 기슭으로 옥천이 흐르고, 남으로 태평양위로 오륙도가 보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때 방어의 요충지로 포진지가 있었고 모두 11개의 굴이 있었지만 허물어 버렸다. 43cm 대형포는 광복후 미군에 의해 부수어졌고 진지터는 굴안에 남아 있다. 2005년 11월 용호농원에 거주하던 한센씨 가족은 62가구 119명 이었다. 이들의 치료와 보호는 1909년 감만동 한센병원에서 시작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관심으로 1911년 부터 감만동 상애원(相愛園) 한센병원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재활과 치료를 맡았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득세는 신앙의 전파와 이와 연계된 의료사업에 지장을 가져왔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당시 군용지였던 용호동 산 2번지 부근인..
1973년 패총이 발견 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1876년 개항당시 이 섬에 인가가 예닐곱채 쯤 있었다는 기록, 어느 해 대구의 황금어장으로 각광 받으며 돈이 몰렸다. 한국전쟁 이후 악명 높은 밀수왕국으로 불리고 1967년 정부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섬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어업자금도 융자하여 바다목장 양식장 등으로 새로운 면모를 갖춘 마을로 활기를 찾지만 1968년 해양대학교 입주가 결정나고 주민들이 뭍으로 떠나야 했다. 1970년 3월 섬을 비울 때만 해도 아치섬에는 108세대 680여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본교였던 조도국민학교가 폐교조치가 있었고 그 해 5월에 학교 문을 닫았다. 아치섬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1740년 간행된 에는 고지도, 동백..
영도구에는 개안마을, 석말추마을, 대풍포마을 등 7곳에 어촌이 발달했다. 남항동의 개안 마을은 해안을 매립하면서 갯벌을 메워 그 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갯바닥을 메워 만들어진 마을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고 현재의 위치는 남항동 3가 이 있던 곳이다.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민가가 있었고, 40여년 전에 마을의 흔적이 없어졌다. 석말추 마을은 남항동의 해안에 입지하였으며, 지명은 해안에 분포한 이암離岩에서 비롯 되었다. 석말추 앞 바다는 어장으로 유명하였으며 석말치, 섬돌추, 성발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평동의 대풍포 마을은 매축되기 이전에 있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 해안지역의 만입부에는 바람을 기다리는 곳, 혹은 바람을 대피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대풍待風'-- 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지명이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