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leaders who carried on the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Japan`s colonial rule formed a number of political parties and organizations after liberation, calling for establishing a unified independent government on the Korean peninsula. In 1947, the US submitted the issue of Korean independence to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The UN adopted the American resolution and decided to e..
조선 후기에는 통신사의 파일(派日) 이외에 조정의 예조참의 명의로 대마도 도주에게 보내는 사절(使節)이 있었다. 이 사절은 대마도와의 외교 현안을 다루는 실무적인 사행(使行) 이었기에 문위역관(問慰譯官)이라 했다. 이들은 역관사(譯官使)라고도 했는데 사역원(司譯院)의 일본어 통역관인 왜학역관(倭學譯官)이 정사(正使)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위역관은 1636년(인조14년) 역관 홍의남 일행의 파견을 계기로 1860년(철종11)까지 224년 사이 54차에 걸쳐 파견되었다. 이 문위역관이 통신사 보다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대마도가 대일외교의 창구가 되었고 대변자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정에 어두웠던 토쿠가와 막부는 통신사의 내방에만 관..
During the conflict, tens of thousands of women - some say as many as 200,000 - from across Asia were sent to military brothels to service Japanese soldiers. Many of the victims, known as "comfort women", were Korean. Many young girls were kidnapp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and were forced to serve as a " Comfort woman " (sexual slavery) of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war. The ones who s..
17~19세기 일본인 마을 왜관 세 곳 1.절영도왜관(1601~1607 영도구 대평동) 2.두모포왜관(1607~1678 동구 수정시장) 3.초량왜관 (1678~1876 중구 용두산 일대) 두모포 왜관이 좁고 습해서 500~1000명 가량의 일본인 살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이에 초량 왜관으로 이전한다. 지금의 지명 '고관' 은 예전 두모포 왜관이 있던 자리 '구관' 을 말한다. 초량왜관(신관)1675(숙종1년) 3월 착공 했다. 대마도에서 사지모쿠자에몽이 기술자 150명 데리고 왔다. 3년만인 1678(숙종4년) 4월에 완공했다. 주변 민가는 지금의 상해문 부근에 설문을 세우고 설문 밖 부산역 건너편으로 이전 시킨다. 건축 자재는 조선에서 제공했다. 집집마다 목욕탕을 건설하는 모습에 씻기 싫어하던 조선 사..
태종대는 영도구 동삼동 산 29의 1에 위치한 1,793,026제곱미터 임야이다. 1972년 문화재 기념물 제28호로 지정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 태종대는 동래부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절영도(영도) 동쪽에 있다. 바닷물이 둘레를 돌고 하나의 돌다리가 있어 노니는 사람이 간신히 지날 수 있다.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조왕이 이곳에서 포장과녁을 두고 활을 쏜 곳이라 하여 그리 이름 했다 한다. 가뭄이 나면 이곳에서 비가 오기를 빌었다. ' 라는 기록이 전한다. 태종대는 영도 태종대 등대가 있는 그 등대에서 바위절벽을 따라 남쪽으로 50m쯤 돌면 바다 위에 나란히 선 넓고 반반한 대(臺)가 둘 있다. 그 대가 태종대다. 돌다리는 절벽에서 굴러내린 바위가 절벽 사이에 낀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에..
At the end of World-War 2, leaders from the US, Britain, and China came to Cairo, Egypt and made decisions about postwar Asia. After the war, foreign ministers from the US, Britain, and the Soviet Union took part in 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and came up with establishing a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and implemented a five-year trusteeship by four countries----the US, Brit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