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에 있는 소나무 한그루를 몰래 베면 곤장이 60대의 형벌에 처해 졌다. 국방과 관련된 송정과 봉산인 만큼 그 관리와 처벌은 엄격했다. 1744년 [속대전] 에 보면 봉산의 큰 나무 10그루를 베면 사형, 9그루 이하는 지방이나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나무 한그루는 곤장이 60대 였다. 18세기 말부터 숲을 조성하는 조장 정책이 도입되었다.국방을 담당하는 수사가 봉산의 관리도 맡아 했다. 조선왕조는 전국에 소나무가 잘 자라는 635곳을 봉산으로 지정해서 벌채를 금했다. 1732년 경상도에 흉년이 들어 7개읍의 백성들이 몰래 봉산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이 일로 해당읍 수령들은 파면 당했다. 이에 경상감사 조현종은 수령들의 구휼행정에 관계된 부분은 정상참작을 부탁했으나 국방상의 이유로 원칙을 고수..
1991년 부터 2023년 까지 32년간의 수종 선호도 조사에서 소나무는 1위를 차지 했다. 50% 이상이 소나무를 지지 했고 2위가 은행나무, 3위는 단풍나무이다. 일반국민과 전문가 집단에서 공히 소나무는 1위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경관적 가치 때문이다. 국민들은 경관적 가치를 우선시 했고 전문가 집단은 인문적 가치와 환경적 가치를 고려했다.우리나라는 산림이 국토의 63%를 덮고 있다. 그 산림의 4/1 이 소나무와 곰솔이다. 유교적인 사상과 조선후기의 송정 정책으로 정부가 소나무를 보호해 왔고, 조선후기 온돌의 전국적 보급으로 연료를 위한 과도한 채취로 지면이 노출될 정도 였는데 소나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교적 잘 자라는 수종이다.중국의 유교경전에 " 천자는 소나무를 구목으로 심고 , 제후는 잣나..
청자를 굽는 온도는 1300도 이다. 재료는 고령토다.보통의 흙은 1000도가 넘으면 타지만 고령토는 그렇지 않다.한자의 靑 이라는 색깔은 영어의 Blu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파란색에 가깝다기 보다는 Green에 가깝다. 고분벽화의 사신도에서 보는 청룡의 색깔도 green이다. 청화백자라고 할때는 보다 Blue 파란색이라 하겠다.청자의 특성 : 물이 새지 않는다. 태토의 가깥이 유리질이 형성되는데 이는 나무재를 이용한 잿물과 덧 입힌 유약이 토기의 재료인 흙속의 규석이 고열에서 반응해서 유리질 화 되기때문이다.청자가 전해진 것은 중국의 월주요로 부터 이다. 상해에서 6시간 거리의 항주부근 明州(영파, 닝보우)가 신라시대의 무역항 이었다. 현재는 `신라방` 이라는 푯말이 남아 있는 곳이 있고 그 위쪽..
A History of Everyday Life Through Relief Supplies (2) 구호물자는 여러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 중 중요한 품목은 의료, 의약품 이었다.한국전쟁은 피를 많이 흘린 전쟁 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수류탄등이 등장하면서 동맥출혈환자가 2차대전에 비해 2배이상 발생했다. 단 한국전쟁에서는 혈액보급이 긴급하게 이루어졌다. 수혈에 필요한 혈액은 미국적십자, 일본주둔 미군 비전투요원, 일본인 지원자 등의 혈액공급이 있었다. 한국전 후반에 혈액은행이 생겼다. 당시 MAS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육군이동외과병원이 생겼다. 양차대전의 산물로 전선부근에서 사단및 연대단위의 의료지원이 가능해졌다. 부상병은 여기에서 치료하거나 후방인 일본으로후..
구호 물자로 살펴본 일상의 역사 (1)A History of Everyday Life Through Relief Supplies (1)1950년대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으로 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는 나라중 하나였다. 1945~1961년 까지 무상지원, 이후 차관으로 그 형태가 바뀐다.해방직후 : LARA(Licenced Agencies for Relief in Asia)전쟁후 주한유엔 민간원조 사령부(United Nation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1960년대 까지 123개 단체에 달했다.(AFK : 한미재단), (CARE : 케아), (Catholic Relief Service United States Catholic Conference : ..
조선시대 저습지 개간하고, 들녘을 농토로 개간하면서 개체수가 줄기 시작했다. 들짐승인 호랑이가 산짐승이 되었고 먹이 찾아 마을로 내려 왔다.호랑이 잡는 호갑사가 있었다. 그래도 멸종 정도 사냥은 안했다. 표범은 개체수 유지 했다.일제시대 1917년 11월 12일~ 12월 3일 '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 가 " 야마토 정호군" 조직해서 조선 반도 범 사냥을 시작 했다.그는 "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일본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 라고 했다.1915~1942 년 까지 한국호랑이 97마리, 표범 624마리, 곰 1039마리, 늑대 1396마리 잡았다 한다.1919~1924 년 사이 매년 평균 호랑이 11마리, 표범 55마리 를 잡았다.그 기간 호랑이 한테 물려 죽은사람이 32명, 가축피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