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농장 마을(현 SK 뷰 아파트 자리)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북으로는 장봉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그 기슭으로 옥천이 흐르고, 남으로 태평양위로 오륙도가 보이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때 방어의 요충지로 포진지가 있었고 모두 11개의 굴이 있었지만 허물어 버렸다.

43cm 대형포는 광복후 미군에 의해 부수어졌고 진지터는 굴안에 남아 있다.
2005년 11월 용호농원에 거주하던 한센씨 가족은 62가구 119명 이었다. 이들의 치료와 보호는 1909년 감만동 한센병원에서 시작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관심으로 1911년 부터 감만동 상애원(相愛園) 한센병원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재활과 치료를 맡았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의 득세는 신앙의 전파와 이와 연계된 의료사업에 지장을 가져왔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당시 군용지였던 용호동 산 2번지 부근인 감만동 상애원에는 외국인, 특히 적국인,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사업기관은 둘 수 없다고 하여 한센환자들을 볼보던 선교사들을 쫓아낸다. 당시 총독부는 1940년 12월말까지 자진 이전이 불가능하면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감만동 상애원은 이전할 형편이 아니었고 그 해 10월 부터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그 마저도 어려웠던 사람들은 12월에 소록도로 강제 이주 된다.

당시 600여명 가운데 200여명은 스스로 길을 찾아 떠났다.

두 차례의 강제 이송에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이듬해 1941년 3월에 소록도로 떠난다.
1941년 3월 감만동 상애원 시절이 마감된다.
강제 이송을 반대하던 환자들의 가족들이 정부에 호소해서 이곳 용호농장 자리에 정착하도록 허락을 받았고 당시 이주해온 사람들이 270여명 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두려워 해서 야밤에 몰래 들어 왔다 한다.
2005년 남아 있던 사람은 60여명 정도였다. 채소, 계란을 생산했고 돼지를 사육했었다.
이곳의 70여만평을 효성그룹사(주) 동성에서 70여만평을 인수를 했다가 부도가 나서 개발이 중단되었다가, SK건설에서 20여 만평에 3천세대 아파트를 지었다.
지금은 모두 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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