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 타워 와 부산근대 역사관
1. 용두산타워 : 1973년 서울타워 보다 2년 앞서서 전국체전 기념으로 만들었다. 이때 꽃시계도 함께 만들었다.
상층부는 다보탑 모양을 땄다. 1955년 12월에 시비, 도비, 시민성금을 모아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 있다.
1968년 4월 27일 세워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보다 앞선다. 일제 시대는 신사가 있던 자리다.
해방 후 주변지명을 충무동, 광복동으로 바꾼 이유는 일제의 기를 누르기 위함이다.
2. 부산근대역사관 : 1921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건설되었다.
1910년 마산에 출장소 세웠다가 1921년 부산지점 완성되자 마산지점이 폐쇄 되었다.
모두 여덟 군데의 지점이 세워졌고 남아 있는 곳은 목포, 부산 두 군데이다.
목포도 근대역사 박물관으로 쓰인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의 국책회사로 설립되었다. 1911~1927년까지 9천호의 일본 농부가 조선으로 이주해 왔다.
이후 소작료를 받는 지주회사화 된다. 사업을 변경하고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해서 1917년 본사를 동경으로 옮기고,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사업에 투자한다.
1945년 해방 후 맥아더 사령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을징수--> 이를 기반으로 신한공사 설치했고
친미, 우익들에게 이를 불하 했다. 1948 대한민국수립과 함께 신한공사는 해산 된다.
1945년 9월 16일 부산에 도착한 미군 제24군단 제40사단의 선발대가 이곳을 숙소로 이용했다.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의 모든 재산과 부채는 한국 정부에 이양한다.
단,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지금의 부산근대역사관)은 이양하지 않는다.
1949년 7월 부터 미국 국무부 산하 해외공보회 기관인 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한다.
1982년 3월 18일 고려신학대학 학생들의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학생 문부식이 주도자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때 검사가 한말 : " 문부식의 생각이 옳다 " , 그리고 되 묻는다. " 그렇지만 피고의 형제나 친척이 그 곳에 있었더라도
불을 지를수 있겠는가 ? "
아메리카 센터 건물 반환 추진위원회 의 반환운동으로 1996년 4월 3일 마침내 우리 정부로 반환 된다.
미국은 47년간 이곳을 무상으로 썼다. 2002년 7월3일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